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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서 하늘을 보다.잡설 _ 배회 2024. 9. 25. 14:25
집을 나서며 올려다본 하늘이 쾌청하다. 요즘 하늘이 참 좋다. 40도 가까이 데워내는 날씨가 여름을 끝끝내 붙들고 있을 것 같더니 그래도 가을이 오긴 오나 보다. 오늘은 종로에서 일정이 있는 김에 창경궁에 가보기로 했다. 어릴 적 그곳은 창경원이었다. 모두의 삶이 퍽퍽하던 꼬맹이 시절 어린이날 같은 특별한 날 창경원에 가는 것은 가족에게 대단한 이벤트였고 동네 골목길에서는 창경원에 다녀온 것이 꽤나 자랑거리였다. 구체적으로 그곳의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오래된 가족 앨범에 빵모자를 쓴 누나와 내가 커다란 코끼리를 등뒤에 두고 잔뜩 상기된 표정과 어색한 차렷자세를 하고 있는 사진에 나오는 그 코끼리가 당시 유명했다던 창경원 코끼리일 것으로 짐작한다.어느 날 창경원은 문을 닫아버렸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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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크스잡설 2024. 9. 14. 15:01
징크스 하나쯤은 다들 있지 않아? 요전에 술자리에서 누군가 던진 말에 하나둘 자기가 가진 징크스를 고백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왔던 징크스라는 게 한국에서 대학 입시를 거친 이들 대부분이 갖는 진부한 내용들이었는데 따져보면 수험생들의 불안한 심리에서 싹튼 미신에 가까운 듯했다. 많은 이들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머리를 자르거나 손발톱을 자르지 않는 징크스가 있었고, 특이한 것으로 숫자 4를 보면 반드시 7을 찾아서 봐야 불운이 오지 않는다는 징크스, 그리고 버스를 기다릴 때 담배에 불을 붙이면 기다리는 버스가 온다는 징크스도 있었다. 버스정류장 담배 징크스는 나도 담배를 끊기 전까지 꽤 잘 들어맞던 징크스였다. 몇 가지 더 들었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다른 징크스들도 그저 평범했던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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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브런치에서 2024. 9. 9. 15:00
왼손잡이는 머리가 좋아. 어릴 적에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내가 왼손잡이임을 처음 알게 된 어른들이 굳이 여느 아이들과 다른 내 행동을 확인하고는 서로 머쓱해질까 봐 혼잣말처럼 내게 건네곤 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내 머리가 나빴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게 왼손잡이여서인지 그냥 내 머리가 괜찮은 편이었던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대부분 어른들이 첫 만남에서 내가 왼손잡이임을 한 번씩 상기시켰던 것을 보면 그 시절 왼손잡이 아이는 유별나 보이긴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 못하는 친구들이 반에 몇몇 있었다. 나는 다행히 훨씬 어릴 적부터 주변의 가깝지 않은 어른들에 의해 왼손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받아 왔기에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할 수 있었다.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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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2024잡설 _ 배회 2024. 9. 6. 13:00
아침이른 아침부터 햇살이 암막커튼의 열어둔 틈 사이를 격하게 밀고 들어온다. 막 6시가 된 꼭두새벽의 바다가 궁금해 틈사이로 소심하게 내다본다. 어딘가에 갓 떠오르고 있을 해가 비추고 있는 남해의 하늘이 벌써부터 훤하다. 훤한 하늘 밑 바다가 고요하다. 숙소 앞에 정박해 있는 예닐곱 대의 요트가 보이고 저만치 방파제가 있고, 더 멀리 드문드문 섬들이다. 해가 덜 떠서일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도 아직 바다에 윤슬이 없다. 창밖 풍경 모든 것이 멈춰있고 고요하니 잘 찍어둔 사진 같다.암막 커튼을 열어젖히고 침대에서 빈둥거리다가 양치와 세수만 하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숙소를 나섰다. 해변까지 다녀올 요량으로 나선 이른 아침 산책길이 벌써부터 뜨끈하다. 바다를 향해 나있는 숙소의 창을 모두 열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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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잡설 _ 배회 2024. 9. 5. 23:59
도쿄에 오다업무차 도쿄에 왔다. 코로나의 습격을 한두해 앞서 왔던 기억이 마지막이니 적어도 오륙 년 만에 찾은 것 같다.사실 지금보다 열 몇 살쯤 젊었던 때 잠시 도쿄에 살았던 적도 있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출장을 오곤 했는데,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방사능의 께름칙 함에 개인적으로 몇 가지 다른 이유들을 얹어 웬만하면 일본에 오는 일정을 잡지 않았었다. 그러니 실제로도, 심정적으로도, 참 오랜만이다. 글쓰기최근에 글을 좀 습관적으로 써볼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시작이 쉽지 않아 이런저런 고민이 많이 있었다. 어떤 글을 쓸까에 대한 고민부터 막상 이런 글을 쓰자라고 결심을 세우고 보면 이미 그런 글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 내가 쓰려는 글들은 쓰이기도 전에 더없이 초라해 보이곤 했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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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잡설 2023. 12. 19. 11:44
“엄마가 깍두기 담갔어. 가져가서 먹어.”누나가 주방에서 뭔가를 챙겨 오며 말한다. “잠깐 제정신 들었을때 담가서 맛있어.” 아버지가 농담을 던지신다.“내가 언젠 뭐 제정신 아닌가?”어머니가 웃으며 아버지의 농을 받으신다.가족 모두 웃음이 터진다.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는 왕년에 음식 솜씨 좋기로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분이셨다. 지금은 어머니 기억에서 ‘왕년의’ 레시피는 대부분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 집안에 음식이 눈에 띄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큰 냄비에 한데 섞어 끓여서 모두 못쓰게 만들어 버리곤 하시니 어머니가 제대로 만드신 깍두기는 우리 가족에게 귀한 음식이다. 평소에 누나가 음식을 싸주려 하면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누나는 ‘엄마가 담갔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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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브런치에서 2023. 9. 5. 13:04
자동차는 좋아하는데 운전하기는 싫다. 조금 모순덩어리 같지만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경치 좋고 쾌적한 곳에서 너무 길지 않게 하는 운전이야 싫어할 이유가 없다만 서울 같은 큰 도시를 돌아다닐 때는 웬만해서는 운전을 피하려 한다. 아무래도 도시 지역이라 길이 복잡하고 붐벼 운전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야 할 경우가 종종 있으니 이런 때의 운전은 내게 겹겹이 스트레스일 뿐이다. 그래서 가지고 다녀야 할 짐이 많은 경우나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경우와 같이 차를 가져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다니는 편이다. 대중교통 중에서는 지하철을 가장 좋아한다. 꽤나 촘촘한 수도권의 지하철 노선 덕에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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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스키잡설 _ 스키 2023. 9. 5. 12:47
바다는 철이 막 지나고 있을 때 찾는 것이 제맛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니 누군가의 동의를 구하진 않는다.뜨거운 여름을 북적거리던 그 많은 인파가 빠져나가고 해변을 가득 메우던 상점들은 성공적이었던 여름 영업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한 시간, 휴가로 여름 장사로 바다를 찾았던 많은 이들이 흘려놓은 아쉬움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그곳이 주는 적당한 어수선함이 좋다. 야간스키는 일요일 저녁이 제맛이다. 주말을 마무리하는 일요일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갈 무렵의 스키장은 어딘가 여름 끝자락의 바다와 닮은 듯 보인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군데도 닮지 않았다. 바다와 산이 닮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때 그 바다의 어수선함이 이곳에도 분명히 있다.오후 스키 영업이 끝날 무렵이면 토요일부터 꼬박 하루를 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