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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쿄에서
    잡설 _ 배회 2024. 9. 5. 23:59


    도쿄에 오다
    업무차 도쿄에 왔다. 코로나의 습격을 한두해 앞서  왔던 기억이 마지막이니 적어도 오륙 년 만에 찾은 것 같다.
    사실 지금보다 열 몇 살쯤 젊었던 때 잠시 도쿄에 살았던 적도 있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출장을 오곤 했는데,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방사능의 께름칙 함에 개인적으로 몇 가지 다른 이유들을 얹어 웬만하면 일본에 오는 일정을 잡지 않았었다. 그러니 실제로도, 심정적으로도, 참 오랜만이다.


    글쓰기
    최근에 글을 좀 습관적으로 써볼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시작이 쉽지 않아 이런저런 고민이 많이 있었다. 어떤 글을 쓸까에 대한 고민부터 막상 이런 글을 쓰자라고 결심을 세우고 보면 이미 그런 글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 내가 쓰려는 글들은 쓰이기도 전에 더없이 초라해 보이곤 했다. 대단한 작품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 만족을 위한 기록일 뿐인데 창작을 해보지도 않고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한심스럽기까지 해서 무엇이건 전환점이 되거나 하다못해 포기할 핑계라도 마련해야 했다.

    도쿄에 오는 기회에 틈틈이 글을 좀 써보자고 결심하고 나름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떠오른 글감은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도쿄를 따라가 보고 그 공간에서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해내다니! 첫 번째 주인공 후보는 1Q84의 덴고였다. 도쿄의 유명한 곳이 아닌, 덴고가 미끄럼틀에 앉아 두 개의 달을 바라보던 그 놀이터에 가서 그 미끄럼틀에 앉아, 두 개의 달이 실제로 있을 리 없으니 그 하늘을 바라보며 상상이라도 해보며 덴고가 된 감정을 적어보고 싶었다. 도쿄에 도착하면 헤매지 않고 일사천리 공원으로 달려갈 생각에 출발 전 진즉에 덴고의 놀이터 위치를 찾아보려 구글을 뒤져보니, 이미 덴고의 놀이터를 다녀간 수많은 사진들에 능력자들의 수려한 문장들이 더해져 구글의 검색 결과를 채우고 있었다. 최초가 되거나 유일한 것이 되겠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그곳에 앉아 그 하늘을 바라보며 덴고와 아오마메를 생각했다 하니 김이 빠져버렸다.

    하루하루 출국 일정은 다가오는데 도쿄에서 어떻게 나의 글쓰기 단초를 만들어갈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백지상태였고 결국 꽤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도쿄에 오게 되었다. 핸드폰이나 아이패드에서 글을 수월하게 쓰기 위해 달포쯤 전에 사둔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가 유일한 준비였다.
    도쿄에 도착하니 머릿속이 더 초조해졌다.
    돌아가기 전에 하나라도 써야 할 텐데, 뭘 쓰지?
    여행 블로그 같은 글을 쓰려는 건 애초에 아니었잖아.
    당최 창작은 해보지도 않고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다. 도쿄에 왔으니 뭔가 도쿄에 관한 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십여 년 전 잠시 이곳에 살았던 때의 기억도 서둘러 짜내어 보고, 그때와 지금의 달라진 도쿄의 모습에서 글감을 찾아보겠다는 의무감으로 이곳저곳에 의도를 담은 시선을 던지다 보니 도착해서 몇 시간 채 지나기도 전에 피로감만 쌓여왔다.

    그냥, 아무거나 일단 써보자. 일기라도 쓰자. 그것도 힘들면, 쓰지 마. 괜찮아.


    진보초
    도쿄의 진보초 거리를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해서 막 가고 싶어 가슴이 뛰거나 한참을 못 가면 그리운 그런 곳은 아니고 도쿄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하루 종일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유일한 곳이라는 호감 정도. 그래서 예전 도쿄에 살던 시절에도 주말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었고 이후에도 도쿄에 오는 길에 시간이 나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다. 진보초에는 고서점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바로 오차노미즈의 스포츠용품 거리가 이어지니 헌책방에서 책냄새를 맡으며 보물 찾기를 하다가 싫증 날 즈음에 스포츠용품 거리로 옮겨 스키용품을 구경하면 하루 종일이 모자랄 때도 있다. 운 좋게도 이쪽저쪽에서 보물 찾기의 성과가 좋은 날은 과소비를 각오해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다행히 일본어가 많이 짧아 진보초 쪽에서 보물을 찾는 경우가 흔하진 않다.

    이번에도 일을 하다가 짬이 나자 곧바로 진보초를 찾았다. 기분 탓일까 예전보다 진보초 거리의 활기가 조금 떨어진 모습이다. 거리가 나이를 먹어 보인달까. 활기가 전 같지 않은 느낌인데 또 서점에 들어가 보면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헌책방에서 오래된 책의 향기에 묻혀 열심히 뭔가를 찾고들 있다. 서점 두 군데만 둘러보기로 하고 비교적 큰 서점에 들어섰다.
    첫 번째 서점을 휙 둘러보고 두 번째로 찾은 조금 작은 서점의 2층에서 영화와 사진 코너의 책들을 잠시 보다가 1층으로 내려오는데 정면 서가에 Michael Jackson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가서 뽑아보니 마이클잭슨의 글과 사진으로 엮어진 'Dancing the Dream’이라는 책의 영문판이다. 구하기 어려운 책은 아닌데 가격이 참 좋다. 상태도 좋다. 고민 없이 집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득템. 진보초가 주는 기쁨이다. 이곳은 여전히 좋구나.



    오차즈케
    일본에 머물던 시절 오차즈케는 내가 가장 즐기는 일본 음식이었다. 원래 국물을 좋아하고 거기다 명란젓을 좋아하니 명란을 얹어서 먹는 이곳의 오차즈케는 전날 술을 많이 마셔 해장이 필요한 날 훌륭한 해장음식이 되어 주었다. 많은 이들이 일본 음식 중에 라멘을 해장으로 꼽곤 하는데 돼지고기 국물의 느끼함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라멘은 해장효과가 전혀 없었고 오직 오차즈케만이 일본에서 유일한 해장음식이었다. 물론 한국의 복지리와 비슷한 복지리나베가 있긴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해장용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동안 오차즈케를 아침식사로 먹었다. 인스턴트식품으로 나온 제품을 밥에 뿌리고 따뜻한 물만 부으면 제법 오차즈케의 맛이 난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음식을 사 먹지 않게 되었고 오차즈케가 생각날 때는 녹찻물을 끓여 밥을 말아 주먹밥을 만들 때 사용하는 제품을 뿌려 먹곤 했는데 일본에서 먹던 그 맛이 날 리가 없다.

    도쿄에 온 김에 오차즈케를 먹어야겠기에 프랜차이즈 오차즈케 식당에 갔다. 오랜만에 다시국물이 들어간 오차즈케를 먹으니 짭조름하면서 달달한 찻물이 예전에 출근 전 급히 해장으로 훌훌 밥과 함께 마시던 따끈한 기억을 불러낸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보니 물에 희석해서 먹을 수 있는 오차즈케 육수를 팔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한 병만 사가서 그 맛을 똑같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오차즈케 육수 한 병을 샀다. 다 먹어버리기 전에 한국에서 해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찾아내야 한다. 올해의 미션.


    하루키 도서관
    나는 지브리박물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다. 우에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으면서도 우에노 공원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국적을 떠나 문학 콘텐츠 자체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참 좋아하는데 와세다대학에 있는 무라카미하루키 도서관에 가보지 못했다.
    지브리박물관은 사전에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는 곳인데 도쿄에 올 때는 매번 일을 하러 오니 미리 시간을 내서 박물관 예약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번에도 불발. 우에노공원은 못 가봤지만 딱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후 시간이 비는 날 서둘러 점심을 먹고 하루키 도서관이 있는 와세다 대학으로 향했다. 기가 쏙 빨리게 복잡한 신주쿠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와세다 역에 내리니 도쿄의 인류는 모두 신주쿠로 몰려간 듯 이곳은 한적하다. 방학이라 그런가 와세다 대학의 교정도 조용하다. 한국의 대학들보다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은 와세다 대학의 동문 가까운 곳에 있다. 건물이 크지는 않은데 터널 콘셉트를 담아 멋지게 지어졌고 -건축을 잘 몰라 터널 콘셉트라는 것은 설명을 듣고서야 눈치챘다.-  국제문학관이라는 이름과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표기되어 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하루키의 저서들이 일본어판의 각 판본부터 외국어 번역본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도 당연히 전시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는 발행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발행되지 않은 책들이 눈의 띄고 그중에 저 책은 어떤 내용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표지나 제목을 가진 책들이 몇몇 있다는 점이다. 궁금하지만 호기심을 푸는 것은 다음 기회에.
    2층에는 프란츠 카프카에 관한 전시가 있었는데 프란츠 카프카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해변의 카프카에서 느낀 당혹스러움이 하루키 도서관의 2층으로 옮겨진 듯, 카프카를 전시하고 있다는 자체가 재미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카프카의 친필 원고와 편지 사본이었다. 신기해서 사진도 찍고 아는 단어라도 찾아볼까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보니 간혹 눈에 띄는 단어들이 발견된다. 하루키 님에게 죄송하지만 카프카 전시물이 더 흥미롭다. 
    하루키 도서관을 둘러보고 와세다 대학의 교정을 나서니 숙제를 하나 마친 기분이다.

    도쿄를 떠나다
    도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리타 공항에 왔다.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오고 있지만 아직 이곳은 견딜만하다. 공항 라운지에 앉아 글을 정리해본다. 아무거나 쓰기로 했으니 아무거나 남긴다.

     

     

    2024. 8. 30 나리타 공항 IASS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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