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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징크스
    잡설 2024. 9. 14. 15:01

     

    징크스 하나쯤은 다들 있지 않아? 

    요전에 술자리에서 누군가 던진 말에 하나둘 자기가 가진 징크스를 고백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왔던 징크스라는 게 한국에서 대학 입시를 거친 이들 대부분이 갖는 진부한 내용들이었는데 따져보면 수험생들의 불안한 심리에서 싹튼 미신에 가까운 듯했다. 많은 이들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머리를 자르거나 손발톱을 자르지 않는 징크스가 있었고, 특이한 것으로 숫자 4를 보면 반드시 7을 찾아서 봐야 불운이 오지 않는다는 징크스, 그리고 버스를 기다릴 때 담배에 불을 붙이면 기다리는 버스가 온다는 징크스도 있었다. 버스정류장 담배 징크스는 나도 담배를 끊기 전까지 꽤 잘 들어맞던 징크스였다. 몇 가지 더 들었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다른 징크스들도 그저 평범했던 것 같다. 시험 전에 죽이나 미역국을 먹지 않는 한민족 고유의 징크스 정도가 있었나 보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시절에 상추를 먹지 않았다. 상추에 있는 어떤 성분이 수면을 유도한다는 글을 읽고 잠을 많이 자면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상추를 먹지 않았으니 징크스라기보다는 나름 과학에 기반한 회피였다고 하겠다. 상추를 먹지 않았을 뿐 공부에 방해가 될만한 온갖 것들을 다 해대며 지냈으니 맛있는 상추도 그냥 먹을 걸 그랬다. 그 시절 이후에는 담배를 피우던 시절 버스정류장 담배 징크스가 있었는데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되어 결과적으로 특별한 징크스 없이 꽤 오래 살아온 셈이다. 몇 해 전까지는.

     

    몇 해 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던 때가 있었다. 이유도 그때그때 달랐는데 어머니는 중증 치매를 갖고 계셔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가족과 의료진은 말할 것도 없고 입원해 있는 다른 분들까지 힘들게 하시곤 했다. 간병인을 곁에 두어도 간병인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 여서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기간이 우리 가족에게는 어머니 걱정과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친데 대한 미안함이 더해져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여느날처럼 섬망 증상을 심하게 보이시던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에서 나도 모르게 제이슨 므라즈의 'Lucky'를 들으며 입으로 흥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플레이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곡이 재생되면서 습관적으로 흥얼거린 것이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고 참담한 심정에 며칠째 일도 하지 못하고 병원에 매달려 있는 상황인데 입으로는 럭키를 흥얼거리고 있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한 달 전 무렵부터 갑자기 이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며 운전을 할 때마다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고 그 무렵부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생활이 시작됐었다. 혹시...

    며칠 후 어머니는 퇴원을 하셨고, 또 며칠 후 운전을 하며 럭키를 듣고 있는데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다시 입원을 하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그리 좋아라 하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럭키는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징크스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연히 그 이후로 아무리 이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아도 듣지 않으려 애썼고, 다행히 어머니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지 않게 되었다.

     

    두어 달 전,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어머니가 넘어지는 바람에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보호센터 선생님들이 어머니를 급히 병원으로 모셨고 누나와 나도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혹시 모를 마취 사고 우려 때문에 시설과 장비가 더 잘 갖춰진 큰 병원으로 옮겨져야 했고 당시에 의료계와 정부와의 갈등으로 큰 병원들이 진료를 대폭 축소해 운영하고 있어 환자를 받을 여력이 부족했던 상황에 고령에 부정맥과 중증 치매가 있는 소위 고위험 환자인 어머니를 받아 주겠다는 병원을 찾을 수 없었다. 꼬박 하루를 속절없이 이곳저곳 병원에 연락을 하며 보내고 다음날 집에 들렀다가 다시 병원으로 가는 길, 빨리 입원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속은 타오르고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여만 갔다. 문득, 제이슨 므라즈를 들어볼까? 상황에 어울리진 않지만 징크스 덕분에 어머니를 입원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누워계신 응급실로 향하며 차에서 제이슨 므라즈의 럭키를 듣기 시작했다. 이 밝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심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간절함을 담아 듣게 되는 상황이 거짓말 같았다. 반시간쯤 지났을까, 아직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포의 한 병원에서 어머니 상태를 보자는 답이 왔다며 어머니와 바로 출발하니 나는 그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뭐지? 이 노래 진짜 효과가 있나? 

    아무튼 이번에는 제목 그대로 럭키하게도 어머니는 그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잘 이겨내셨다. 덤으로 나는 제이슨 므라즈의 럭키 징크스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를 듣지 않고 있다. 제이슨 므라즈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콜비 컬레이의 허스키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의 아름다운 조화가 그리울 때가 있지만 이 징크스의 효과가 무척 강력하고 괴로우므로 그리움을 꾹꾹 눌러낸다. 징크스를 한번 깨 볼까 시도를 하기에는 실패했을 때 피해가 너무 크다. 그냥 참고 살아야겠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에 연휴 기간 의료 공백에 대해 걱정들이 많다. 어머니가 연휴 기간에 혹시 아프시기라도 하면? 제이슨 므라즈에게 또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그런 일이 안 생기길 바랄 뿐이다. 

     

     

    2024. 9.14.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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