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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깍두기
    잡설 2023. 12. 19. 11:44

    “엄마가 깍두기 담갔어. 가져가서 먹어.”
    누나가 주방에서 뭔가를 챙겨 오며 말한다. 
    “잠깐 제정신 들었을때 담가서 맛있어.” 
    아버지가 농담을 던지신다.
    “내가 언젠 뭐 제정신 아닌가?”
    어머니가 웃으며 아버지의 농을 받으신다.
    가족 모두 웃음이 터진다.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는 왕년에 음식 솜씨 좋기로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분이셨다. 지금은 어머니 기억에서 ‘왕년의’ 레시피는 대부분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 집안에 음식이 눈에 띄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큰 냄비에 한데 섞어 끓여서 모두 못쓰게 만들어 버리곤 하시니 어머니가 제대로 만드신 깍두기는 우리 가족에게 귀한 음식이다. 평소에 누나가 음식을 싸주려 하면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누나는 ‘엄마가 담갔어’를 되풀이하며 귀한 음식임을 강조한다. 나도 어머니가 모처럼 손수 담그신 깍두기를 마다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사실 나는 군에서 전역한 후 한동안 깍두기를 먹지 않았다. 깍두기에 다시 손이 가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불과 몇 해 전의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도 자도 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는 훈련병 시절, 그때 우리나라에 무 생산이 넘쳐났는지 훈련소에서 식사는 언제나 깍두기와 함께였다. 그 시절 깍두기라고 배급되던 것이 식단표에는 깍두기라 쓰여있지만 정작 식판에 받아 든 것은 고춧가루가 두어 개 묻어 있는 연한 초록빛의 무 조각이었는데, 맛은 영락없이 씁쓸한 생무였고 그마저도 다른 훈련병들보다 한 조각이라도 덜 받기라도 하면 대단한 차별을 당한 것 같은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한 번은 맞은편 녀석이 자리에 앉으며 ‘내 깍두기는 너희들 것보다 더 잘 담가진 것 같아’라고 자랑을 했는데 식판을 보니 정말 녀석의 깍두기는 다른 식판에 있는 것과 달리 전체적으로 제법 붉은 기운이 있었고 고춧가루도 훨씬 풍족하게 발라져 있었다. 훈련소 식탁에서는 다른 사람과 잡담이 허락되지도 않고 잡담을 나눌 여유도 없기에 그냥 지나쳤지만 유치하게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긴 했던 것 같다.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자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식판에 깍두기를 담지 않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나의 편식 목록에 깍두기가 제대로 들어앉아버렸다. 사회에 돌아와서는 맛있는 깍두기를 먹을 기회가 자주 있었지만 딱히 깍두기에 손이 가지 않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집에 가져온 어머니의 깍두기를 다음날 밥상에 올려 맛보았다. 상큼하고 아삭하게 잘 익은 깍두기 맛이 입안을 채운다. 맛있다. 그래 깍두기는 원래 이런 맛이었어. 행여 남겨서 버리기라도 할까 식사 때마다 조금씩 개수를 세어 접시에 담고 알뜰하게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귀한 깍두기의 마지막 조각을 접시에 담게 되었다. 아… 끝났구나. 마지막 깍두기 조각을 입에 넣고 한참을 입안에서 굴려본다. 입안에 굴러다니는 그 조각을 기억에 담으려 애쓴다.

     

    202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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