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남해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대학원 시절이었다. 이전까지 내 머릿속 남해는 초등학교 때 사회 교과서에서 보았던 '육지와 섬을 다리로 연결해서 이제는 섬사람들도 육지에 공동 생활권 어쩌고 저쩌고' 류의,  발전한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글과 함께 실린 남해대교의 사진이 전부였다. 사실 우리나라에 남해라는 지역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지내다시피 했다. 남해는 남해바다일 뿐.

 

     휴가철 한껏 들떠있는 세상을 등지고 관악산 중턱의 도서관에 스스로 갇혀 지내던 시절, 함께 공부하던 친구와 점심을 먹고 나른한 기운에 무엇인가에 홀린 듯 충동적으로 목적지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 그곳 남해를 처음 찾았다. 그때 남해에는 갓 공사를 마친 스포츠파크가 있었고, 여름휴가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한 바다가 있었다. 연안에 흩뿌려진 작은 섬들이 만들어 내는 한가로운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텔레비전 스포츠뉴스에서 방송되던 메이저리스 선수들의 스프링캠프 훈련장과 꼭 닮아있던 스포츠파크와, 달력에서나 봄직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이 나의 첫 남해의 기억이었다. 

 

     남해를 처음 겪은 후 2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를 뒤적거리던 어느 날, 남해에서 한 달 살기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그 게시물이 문득 어딘가에 꽁꽁 싸매어져 있던 남해의 기억을 풀어주었다. 그 멋졌던 남해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남해 한 달 살기는 나이 제한이 있었고, 몇 가지 단체 활동이 조건으로 붙어 있어 혼자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내게 그다지 매력적인 기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침 그 무렵 계속된 과로와 처리해야 할 일의 중압감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던 아내에게 뭔가 적당한 휴식을 권하고 싶어 하던 차라 남해 한 달 살기는 아내를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시물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이런 게 있네? 남해 예전에 아무개랑 가봤는데… 나는 주절주절 예전에 느꼈던 남해의 첫인상을 아내에게 설명해주려 했지만 더 이상 설명은 의미가 없었다. 아내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 '남해'라는 말에  이미 결정을 내려 버렸다. 그리고 그해 9월 우리는 아내의 한 달 살기 짐과 자전거를 차에 싣고 함께 남해를 향해 떠났다. 나의 임무는 한 달 살기 숙소까지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동행하고, 다시 그 차를 운전해서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남해에 두 번째로 발을 들였다.

 

     두 번째 찾은 남해에서는 반나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을 보냈다. 남해에 들어가 자갈이 가득 깔려있는 아담한 해변에서 아내와 서로 떨어져 있을 한 달간의 무탈을 빈 후 곧바로 숙소로 향했고, 운전대를 넘겨받은 나는 하릴없이 남해의 해안도로를 따라 이순신 공원에 들러 캔커피를 한 개 마신 후 서둘러 분당의 집으로 향했다. 그즈음 '난중일기'와 ‘칼의 노래’를 읽으며 충무공에 빠져 있던 때라 이순신공원에는 들러야만 했다.

     스치듯 겪고 온 남해는 20여 년 전과 그저 같아 보였다. 한결같아 보여 더 반가웠음에도, 어린 시절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좋은 느낌을 가졌던 친구를 어른이 된 후 어색하게 마주친 것처럼 나는 남해를 데면데면 대하고 말았다. 

 

     아내는 한 달을 남해에서 지내며 꽤나 성공적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어냈다. 그동안 나는 아내가 보내주는 소소한 일상의 사진들, 그 일상의 뒷공간을 채우고 있는 멋진 풍경을 부러워하며 고양이들과 함께 아내의 빈자리를 메워가고 있었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났고 아내를 데리러 남해로 향했다. 아침 일찍 숙소로 찾아가 아내를 만나 남해를 둘러보고 돌아올 요량으로 하루 앞서 집을 나섰고, 그 하룻밤을 남해가 아닌 여수의 호텔에서 홀로 머물렀다. 왜 남해를 외면하고 여수를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힘들던 시절을 치유해 준 작은 일탈의 기억이, 행여 그 기억이 많이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그저 그대로 좋게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이 선뜻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게 만들었나 보다. 여전히 나는 남해를 데면데면 대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남해에 가던 날, 아침 일찍 여수의 호텔을 떠나 아내의 숙소로 향했다. 해안도로를 운전하는 내내 작은 긴장이 있었다. 한 달 만에 아내를 만난다는 설렘과,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는 설렘이었다. 드디어 아내를 만났고 우리는 하루짜리 남해 여행에 나섰다. 한 달간 남해에 머물던 아내는 내게 베테랑 급의 여행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오래된 필름을 보는 것처럼,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남해는 어쩌면 비현실적으로 보일 풍경들을 아주 겸손하게 이곳저곳에 감추었다가 슬쩍 풀어내어준다. 뿌옇게 바래져 있던 기억 속 풍경들이 다시 또렷하게 자리 잡는다. 멋진 풍경과 한적한 바다에 빠져들어가 현지인이 다 되어 버린 아내를 따라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녔다.

     오후가 잔뜩 무르익은 즈음 잠시 쉬자며 바닷가에 자리한 카페에 들렀다. 카페 옥상에 야외 테이블이 있었고 바다를 바라보며 편안하게 반쯤 누워서 쉴 수 있는 카우치가 있었다. 아내와 나란히 옥상 카우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 남해 참 좋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끊임없이 나왔다. 똑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도 전혀 이상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치 그치. 아내도 나의 감상에 함께해 주었다. 햇살도 따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 가장자리부터 실밥이 풀리듯 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채 머릿속도 마음도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에 빠져들었다. 귀에 거슬리는 찰나의 소음조차도 없었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주변의 대화 소리도 없었다. 고요한 한낮의 바람소리와 적당히 떨어진 거리의 해변을 드나드는 무심한 파도 소리, 그리고 가끔 존재감을 뽐내려는 듯 짧게 내지르는 갈매기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저 조용한 바닷가의 소리, 낡은 턴테이블로 돌리는 LP의 여백에서 들리는 지글지글 툭툭 튀는 소리의 푸근함, 영사기로 돌리는 옛날 영화의 정적의 구간에서 스피커가 잠들지 않게 하려는 듯 스며 나오는 지글거림.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여백이고 그 장면이었다. 그 따뜻한 정적에 녹아들면서 한없이 편안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처음 느끼는 이 평온함을 마음껏 누렸다. 아내는 곁에서 나의 이 생경한 휴식을 말없이 지켜주고 있었다. 짧지만 행복한 이 순간으로 나는 남해와의 어색함을 풀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남해의 그 여백이 채웠다.

 

     이듬해 봄, 다시 남해를 찾았다. 요전번 아내가 참여했던 한 달 살기  프로그램으로 인연이 된 분들이 주관하는,  남해가 디지털노매드 세대에게 매력적인 곳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를 주제로 한 간담회에 아내와 함께 초대되었다. 교통비와 식사와 호텔이 제공되었고 공적인 일정이 이어진 출장길이었지만 이미 남해와의 어색함을 떨쳐내었던 나와 한 달 살기 후 내내 남해 앓이에 시달려온 아내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틈날 때마다 벚꽃이 만발한 남해를 하나라도 더 기억에 담아내려 애썼다. 녹록지 않은 일정이었기에 벚꽃이 가득한 남해의 봄풍경을 두고 돌아오는 길이 무척 아쉬웠다.

 

     다시 가을, 남해에서는 새로운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아내는 남해로 떠났다. 이번에는 자전거를 가져가지 않고 차를 운전해 가서 남해에 머무는 동안 좀 더 구석구석 돌아다니겠단다. 차를 다시 집에 가져다 둘 필요가 없으니 아내 혼자 남해로 향했다. 한 달 후 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남해로 향했다. 사천공항에 아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아내를 다시 보니 좋았고 남해에 오게 되어 좋았다.

 

     다섯 번째 방문에서는 아내와 함께 어촌마을 언덕배기에 자리한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지냈다. 1층에는 카페가 있고 2층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마당에 고양이 가족이 살고 있다. 판자를 잘라 얼기설기 세워둔 울타리가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이 소박하면서도 예쁘다. 울타리 여기저기에 고양이 가족들이 한 자리씩 꿰차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고 울타리 너머로 작은 어촌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어촌 마을이니 당연히 그 너머에는 작은 선착장을 가진 아늑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한 달 만에 만난 아내와 함께 남해를 만끽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난 한 달을 함께 나눈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공용 식탁에 토스트와 계란, 시리얼, 과일들이 아침식사로 차려져 있었다. 아내는 아침을 거르겠다고 하고 다른 방에 있는 여행객들도 딱히 기척이 없었던 터라 게스트하우스의 아담한 6인용 식탁을 홀로 차지한 채 토스트와 과일을 먹었다. 보통의 가정집 거실 겸 주방 구조에  해당하는 이 공간에는 주인장의 아기자기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잔잔한  BGM이 아주 작은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커다란 창문에는 작은 어촌마을과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청량한 파란 하늘이 있었다.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창밖과 게스트하우스의 그 공간을 번갈아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순간 요전의 그 여백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시에서 가져온 머릿속 찌꺼기들을 모두 비워내며 어촌 마을 게스트하우스의 정적에 한참을 빠져들었다. 이 시간이 계속되길 바랐다.

 

     몇 차례의 인연이 이어진 남해는 내게 여백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주었다. 이제 아내와 나는 창밖으로 논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아내의 작업실과 나의 서재를 남해 어딘가에 갖게 되기를 꿈꾸며 산다. 논 너머 바다는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풍경이다. 그 풍경이 왜 좋은지 물어보니 그렇게 안정감을 주는 풍경이 없단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나도 그 풍경을 좋아하게 되었다. 

 

     올해도 어느 날 좋은 때 우리 부부는 남해에 갈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그 풍경과 내 머릿속을 비워 줄 편안한 여백이 기다려진다.

 

 

 

2022. 1 Brunch